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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 아웅산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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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2@#6 2021. 2. 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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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 아웅산  수치

미얀마, 아웅산 수치

어제 새벽 전격적인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가 문민 정부의 장차관을 대거 교체  1년 간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현재 모든 항공기 운항이 중단됐으며 국제사회는 일제히 평화적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젯밤 장관과 차관 24명의 지위를 박탈 하고 국방부와 외무부 등 11개 주요 부처 장관을 새로 지명했습니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을 구금한 데 이은 후속 조치입니다.

 

수치 고문이 이끄는 민족주의민족동맹은 지난 2015년 53년 간의 군부 통치를 끝냈지만 다시 독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치 고문은 성명을 통해 시민들에게 "항의 시위에 나서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고, 군부가 즉각 권력을 포기하지 않으면 제재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아웅산 수치 15살 때부터 시작된 30여 년에 이르는 외국 생활 동안 그녀는 학자로서,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운명의 1988년 어머니 킨 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영국에 머물던 아웅 산 수 치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8월 버마에서는 888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버마의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 산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자신들을 위해 행동해주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자 의무였다.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고 싶었을지도 모를 40대 중반의 아웅 산 수 치는 안온했던 삶을 뒤로 한 채 가시밭길 같은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웅 산 수 치는 버마 국민에게 희망의 이름이자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평범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행복 따위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조국 버마가 그녀를 불러 들였다.

 

 2015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끌고 있던 NLD가 승리를 거뒀으나, 그녀는 자녀와 남편이 영국 국적자인 이유로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지만 국가자문역 겸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돼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했다는전 세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그동안 수상했던 각종 인권상을 박탈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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