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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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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2@#6 2021. 3. 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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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어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 강무 참여 등 맡은 바 역할을 다했지만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폐위되었다.

 

양녕대군

이후에도 갖은 기행으로 세간에 물의를 일으켰지만 동생 세종의 각별한 배려 덕분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양녕대군 이제(李禔)는 조선 개국 2년 뒤인 1394년(태조 4년) 정안대군 이방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의 네 번째 임금 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본래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방원은 세 아들을 얻었지만 모두 요절한 탓에 그가 장남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자식은 아들 3명을 뺀 4남 4녀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움켜쥐는 과정에서 위기를 겪을 때마다 양녕대군으로부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실록에는 태종이 그에게 다른 자식들보다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던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양녕대군은 10세 때인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이제(李禔)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한 달 뒤인 4월 8일 원자에 책봉되었으며, 다시 넉 달 뒤인 8월 6일 왕세자에 책봉되어 1418년(태종 18년)까지 약 16년 동안 세자의 자리에 머물렀다.

 

세자 시절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공부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하한 1407년(태종 7년), 13세의 나이로 전 총제 김한로의 딸과 혼인했다.

 

 

그해 9월 25일 정조(正朝)를 하례하는 진표사(進表使)로 임명되어 명의 수도에 파견되어 영락제를 알현했다.

 

당시 태종과 친분이 돈독했던 영락제는 ‘너는 나의 아들이나 다름없다.’며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그처럼 국제적으로도 조선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받았던 그는 천재지변이나 병환으로 태종이 집무하지 않을 때 내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의 전적을 두루 섭렵했고 무술에도 뛰어났으며 경회루의 현판을 쓸 만큼 명필이었다.

 

그러므로 태종의 철권통치에 지친 신료들은 하루빨리 세자의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양녕은 세종 즉위 초기 남의 첩을 빼앗는 등 구태를 되풀이했다. 급기야 장월하, 고치우, 김경 등 추종자들과 함께 처가인 김한로 세력과 접촉한 일이 드러나 조정을 긴장시켰다.

 

세종 4년에는 충복이었던 김인의가 양녕에게 상감 칭호를 함으로써 정치적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그런 사실이 공론화되었다는 것은 양녕대군이 요주의 사찰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방에서 그때 양녕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세종은 부왕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뒤 양녕대군은 주로 경기도 이천에서 거주했다

 

 

평생을 제멋대로 좌충우돌하며 지냈던 양녕은 다행히 천수를 누렸다. 만일 당시의 임금이 세종이나 세조가 아니었다면 그는 필경 소현세자나 사도세자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1462년(세조 8년) 9월 7일 서울의 자택에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68세의 장수한 나이였고, 세 살 아래로 53세에 붕어한 세종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자녀는 정실에서 3남 5녀를 두고, 측실에서 7남 12녀를 두었다. 그의 졸기에 기록된 사평(史評)의 한 부분은 음미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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